[디스크립션: 주제 소개]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이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움직였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 전인구에 1프로 정도나 되지 않을 것 같다. ‘파병’이라는 말은 익숙해도, 실제로 어떤 도시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자주 들을 기회가 없다. 다낭이나 퀴논 같은 도시 이름은 당시 병사들에겐 너무도 익숙했지만, 지금은 지도에서조차 찾기 힘들다. 이 글에선 한국군이 주둔했던 베트남의 몇몇 도시들을 중심으로, 그 안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다시 꺼내본다. 말 그대로, 지도 위가 아닌 땅 위의 이야기다.
1 - 긴장감이 감돌았던 중부도시들
우리 국민들이 여행을 가장 많이 가는 베트남 도시중 한 곳 다낭은 전쟁 내내 긴장이 끊이질 않았다. 거긴 그냥 도시가 아니었다. 미군도 한국군도, 수송이든 통신이든 거의 다 다낭을 거쳐 갔다. 헬기 날아다니는 소리가 하루 종일 들렸고, 바닷가 근처에 있던 병참 기지는 늘상 북적북적했다. 다낭은 그야말로 전쟁의 신경줄이었다.
그보다 더 깊숙한 지역인 꽝남, 꽝응아이는 상황이 좀 달랐다. 그쪽은 그냥 위험했다. 맹호부대, 청룡부대가 거기 있었다는 건, 그만큼 전투가 하루가 멀다 하고있었다는 뜻이다. 야간에 매복 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도로 하나 확보하려고도 며칠씩 걸렸다. 한 병사는 그 지역을 "땅 전체가 덫 같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꽝응아이는 아픈 기억이 있는 곳이다. '빈호아 사건' 같은 민간인 피해가 있었고, 그 일은 지금도 많은 논쟁을 낳는다. 그 당시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 입장에선, 매일 뭔가 부서지고, 동시에 뭔가 다시 지어지고 있었다. 전투와 복구, 두 얼굴이 공존했던 위험과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지역이었다.
2 - 남쪽 도시들, 전투보다 사람
반면, 남부의 도시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퀴논, 닌호아, 푸옌 같은 데서는 총성보단 공사 소리가 더 자주 들렸다. 퀴논은 특히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거기선 도로 정비나 학교 보수 같은 일이 많았고, 병사들이 아이들한테 간식을 나눠주는 사진도 꽤 남아 있다. 전투는 거의 드물었고, 대신 사람들과 마주하는 일이 많았다. 전투에 있어서는 후방지역이었다.
닌호아도 마찬가지다. 도로 공사, 우물 파기, 교량 보수. 전쟁 중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살림’하는 분위기가 많았다. 물론 긴장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중부처럼 하루하루가 위험하고 긴장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푸옌은 뒤에서 움직이는 도시였다. 병참기지로 쓰였고, 작전 준비나 보급 쪽 중심이었다. 실제 병사들은 "푸옌에 배치되면 숨 좀 돌릴 수 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거긴 전쟁터라기보단, 전쟁의 그림자를 옮기기 위한 짐칸 같은 역할이었다
3 - 도시마다 달랐지만, 다들 무거웠다
어느 도시에 있든 한국군 병사들이 했던 고민은 비슷했다. ‘오늘은 무사히 보낼 수 있을까’, ‘이번 작전이 끝나면 쉴 수 있을까’, ‘다시 집에 갈 수 있을까.’ 다낭에 있든, 퀴논에 있든, 결국 사람 사는 데였고, 전쟁 속에서도 평범함과 편안함을 지키려는 노력은 있었다.
각 도시별로 역할은 달랐지만, 모두 공통적으로 뭔가를 지키려 애썼다. 어떤 지역은 매일 공격해 오는적을 막아내야 했고, 어떤 지역은 무너진 마을을 일으켜야 했다. 그건 단순한 전투 임무가 아니라, ‘책임’이었다. 복잡한 정치, 낯선 땅, 서로 다른 언어 속에서도, 누군가는 길을 닦고, 건물을 보수하고 누군가는 아이들을 안고 있었다.
물론 모든 게 옳았던 건 아니다. 어떤 일은 지금 기준으로도 납득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 모든 도시들에서 있었던 일들이 하나둘 모여, 전쟁이라는 이름의 퍼즐을 완성한다. 전쟁의 실체는 전투가 아니라, 그 도시들 안에서 매일매일 만들어지던 삶의 단편들이 아닐까.
4. 한국군 주둔 도시별 정리 (베트남전 ) :결론
베트남 전쟁 속 한국군의 주둔지는 단순한 ‘작전 위치’가 아니었다. 그건 사람들의 땀이 배인 장소였고, 긴장과 희망이 교차하던 진짜 공간이었다. 다낭이든, 퀴논이든, 그 이름 안엔 그때 그 사람들의 하루하루가 들어 있다. 전쟁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들의 자리에서 바라봤던 풍경부터 다시 꺼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