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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vs 일본 군사력 차이

by 인생은 허리 2025.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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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크립션 : 주제

19세기말, 조선과 일본은 각기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조선은 외세의 압박 속에서 근대화의 문턱에 겨우 발을 들인 상태였고,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군사력과 산업을 빠르게 정비하며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특히 1890년대는 양국 군사력의 격차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큰 체급차이로 극명하게 드러난 시기로, 병력 규모, 무기 체계, 훈련 방식 등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이 글에서는 당시 조선과 일본의 군사력을 다양한 각도에서 비교해 보며, 그 격차가 조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살펴본다.


1. 병력 규모의 차이 – 숫자에서 이미 판가름난 격차

1890년대 조선의 병력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대한제국 수립 전후로 진위대 체제가 정비되긴 했지만, 전국적으로 운영된 병력은 약 1만 명 내외로 추정된다. 이마저도 연대별 병력 수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고, 실질적인 전투력이 뒷받침되는 인원은 더 적었다기보다는 거의 없다고 봐야한다 . 반면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징병제를 실시하며, 전 국민을 대상으로 병력 기반을 넓혀나갔다.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 육군만 약 24만 명을 동원할 수 있었고, 예비군을 포함하면 이보다 훨씬 많은 병력 운용이 가능했다.

조선은 여전히 군사력보다는 외교를 통해 평화를 유지하려 했고, 대규모 병력 운용을 위한 재정이나 사회적 기반이 부족했다. 특히 군에 대한 정부의 관심도는 형편없이 낮았으며, 정치 혼란과 내정 불안은 병력 유지 할수있는 여건이 아예 없다고 볼 정도로 어려운 환경이었다.  반면 일본은 국방을 국가 존립의 최우선 가치로 두었고, 근대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군사력을 강화했다. 이런 배경에서 병력의 양적 격차는 단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체계의 차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2.  총포에서 함포까지 압도적 차이나는 무기

무기 분야에서는 조선과 일본의 격차가 더 극명했다. 조선의 군대는 여전히 일부 부대에서 조총이나 활, 창을 사용하는 전근대적 무기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진위대와 훈련대 등 신식 군대가 외국 무기를 도입하기는 했지만, 수입량이 제한적이었고 장비 보급도 고르지 않았다. 또한, 무기를 제대로 유지하고 정비할 수 있는 체계도 잡혀있지 않아서 실전 운용에 있어 많은 제약이 따랐다.

반면 일본은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열강으로부터 최신 무기를 대량 수입했을 뿐 아니라, 자체 무기 생산도 가능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일본 육군은 독일식 보병 전술을 채택하고, 마우저 소총과 같은 현대식 무기로 무장했다. 해군의 경우도 조선은 사실상 무력한 수준이었던 반면, 일본 해군은 청일전쟁 당시 이미 철갑함과 어뢰정 등 근대적 전함을 운영하며 청나라 북양함대를 무너뜨릴 정도였다.

조선은 소규모 해군조차 유지하지 못했고, 외국의 군함이 한강과 인천 앞바다에 출몰해도 실질적인 대응이 불가능했다. 일본은 이미 해군력을 국력의 핵심으로 삼고 있었고, 제해권 확보를 위해 막대한 예산과 인력을 투자하고 있었다. 결국 양국의 무기 체계는 단순한 기술 격차가 아닌, 국가 의지와 전략적 목표의 차이로부터 비롯된 결과였다.


3. 훈련과 군사 조직 – 실전 경험과 체계화된 군제

조선 군대는 군사 훈련이 제한적으로 거의 없었고. 진위대가 편성되며 일정한 훈련 체계가 마련되었지만, 병사 개개인의 숙련도는 아주 낮은 편이었고, 지휘 체계도 엉망인 오합지졸 군대였다 . 특히 외국 교관에 의존해 훈련을 실시했기 때문에, 군사 철학이나 전략 전술이 내재화되지 않았다. 전통 군대와 신식 군대 간의 충돌도 문제였고, 군 내부의 사기 저하와 무기력감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반면 일본은 1870년대부터 프랑스식, 이후 독일식 군제 모델을 철저히 도입했다. 사관학교를 통해 장교를 양성했고, 전역 군인을 예비군으로 편입해 전시 동원 체계까지 완비했다. 청일전쟁은 일본 군이 이러한 군사 체계를 실전에 적용해 성공적으로 운영했던 대표 사례다. 병사들은 실제 전장에서 전투 경험을 쌓았고, 이는 이후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로 이어졌다.

조선에는 그런 실전 경험도, 장기적인 군사 전략도 부재했다. 군대가 국가를 지키는 최전선이라는 개념보다는, 정치적 상징이나 구색 맞추기에 가까운 존재로 여겨지던 분위기가 강했다. 일부 장교들이 근대 군사 이론을 익히기 위해 유학을 떠났지만, 이들의 영향력은 체제적으로 확산되지 못했다. 결국 조선 군대는 외형적으로만 ‘신식’이었지, 실질적인 작전 능력이나 조직 완성도는 일본과 비교해 현저히 떨어져 있었다.


4. 결론 – 군사력의 격차는 외교의 결과이자 원인

1890년대 조선과 일본의 군사력 비교는 단순한 전력 차이를 넘어, 두 나라가 어떤 국가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척도다. 일본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국제 질서에서 주도권을 잡고자 했고, 실제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그 목표를 달성해 나갔다. 조선은 근대화를 시도했지만, 너무 늦었고 너무 불완전했다. 병력, 무기, 훈련, 조직 어느 하나도 일본과 맞설 수 없는 상황에서, 외교적 자주권을 지키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다.

결국 조선은 1905년 우리민족에 있어서 가장 치욕스러운 을사늑약, 1910년 경술국치로 이어지는 식민지화의 길을 걷게 된다.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국가는 외교에서도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역사적 교훈을 조선은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 시기의 군사력 비교는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안보와 외교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사례이기도 하다.